J가 추천해준 두 번째 책, 1인분의 여행. 가볍게 읽어 넘기기 좋은 여행 수필 책이다. 나도 예전같질 않아서 여행책에 마음이 울렁거리고, 몸이 떨리고 하진 않는다. 책 표지만 보고도 심장이 쿵쾅거리던 때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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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인분의 여행은 그래서 더 좋았다. 마음을 훔치는 문장이 없어도,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 내가 보이고 내 주변 사람들이 생각나는 여행기랄까. 어느 순간 여행책을 읽으면 그들의 감정이나 순간을 강요한다고 여겨 안보게 되었는데, 이 책은 '여기 최고야! 너도 떠나!' 말하지 않고, '이런 멋진 곳에서 이렇게 멋진 사진/글/생각을 하니 대단하지?' 으스대지 않는다.
"나는 그랬어. 나는 이런 사람인가봐. 그건 좀 위험한 짓이었지, 후후." 정도의 태도와 거리감이 참 편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 중에 하나인 최정례 시인의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와 닮았다.
그는 나보다 어렸지만 어딘가 매사에 너그러운 구석이 있었다. 너그러운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함부로 위로받는 기분이다. 동시에 조금 불편한 기분이다. 나의 너그럽지 못함이 자꾸만 티가 나서, 그것은 타고나 성품이거나 오랜 세월이 사람들에게 주는 장기근속상같은 것이 아닐까.
'함부로' 위로받는다는 문장이 좋다. 너무 좋은 사람 곁에 있으면 불편한 기분이 든다는 말에도 공감이 간다. 황경신의 소설 '17'의 문구가 생각나는데, 조금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부주의한 친절이야...그건 마치 약음기가 없는 피아노와 같은 거야. 처음에는 어떤 멜로디처럼 들리지만, 결국 모든 것이 엉키고 엉망이 되어버려서 연주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무의미해져.'
부주의한 친절을 경계해야하고, 너그럽고 좋은 사람에게 '함부로' 위로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는- 사람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좋으면 기대고 싶고 기대하게 된다. 함부로. 그리고 함부로 실망하고 상대를 탓한다. 한 사람을 한 사람 그대로 보는 것, 편견이나 색안경 없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내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누군가를 함부로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어떤 단어에 매우 잘 현혹되는 편이다. 그 단어의 울림이 좋아서, 뜻이 좋아서, 혹은 단순히 그 단어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날씨가 좋아서 같은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진짜 이유를 말하자면 '왠지'라는 모호한 말이 가장 명확할 것이다...어떠한 파열음도 없이 그저 입만 멍청하게 벌리고 있으면 발음할 수 있는 그라나다가 '왠지' 좋았고, 싸구려 선탠기로 그을린 피부 위에 화려한 색조 화장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 한물 간 드랙퀸(Drag Queen)의 본명일 것 같은 브라티슬라바가 '왠지' 좋았으며, 삶(Life)에 대해 무언가를 깨달은 인간들만 살고 있을 것 같은 라이프찌히가 '왠지' 좋았다.
그냥 누군가에게 엎어져서 울고 싶을 때 세상은 도무지 '그냥'이라는 이유를 유연하게 넘기지 못했다. '인간애'라는 말은 너무 거창해서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내가 조금 기댄다고 해서 너가(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이유들로 매사에 긴장하곤 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울지 않기 위해. 보다 유쾌해지기 위해. 어쩌면 때늦은 반항일지도 모른다. 여행을 할 때에 무얼 좀 도와달라는 말이 참 쉽게도 나오는 것은,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혹은 조금만 더 부지런하게 굴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앞에서도 나는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너가 좀 도와주면 안돼?
이유를 붙이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그 상황에 꼭 맞는 단어가 없기도 하고, 이유를 찾는 순간 그 이유 때문에 내 감정이 변질될 것 같은 생각 등등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 그럴 때는 그냥 입을 다물거나 '왠지-' 또는 '그냥-'이라고 눙치곤 한다.
책을 읽고 J와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게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가 1인분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다 한 번씩 동행할 사람을 만나 '기본 2인 메뉴'도 맛보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면 된다. 그러니 동행길이 끝나고 너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또 1인분의 여행자를 조우하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인생은 1인분의 여행, 한동안 이 말을 가지고 다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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