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책을 선물해주는 사람은 달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누군가가 이 책 한 번 읽어봐, 하고 건네준다면 일단 감격이다. 무조건 감격이다. 책 선물만큼이나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플레이리스트를 보는 것만큼, 숨길수 없는 개인의 취향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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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모든 요일의 기록"은 J의 손때가 담겨 있어서 좋았다. 곳곳에 써놓은 메모와 밑줄, 한 귀퉁이가 접혀 있는 페이지들을 보며 그녀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감정이 일렁였다. 그저 그 손 때만으로도 말이다.
누군가의 애정이 고스란히 담긴 책.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책을 꼼꼼히 살폈고, 사색에 잠겼다. 나중에는 이런 책을 빌려줘서 고맙다는 것을, 읽는 태도로 증명해야한다는 강박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그만큼 소중히 읽었다.
"좋은 일을 만났으면 좋겠어."
"어떤 거?"
"그냥.. 작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 일 말이야."
세렌디피티를 기도해준 J 덕분에, 미국 출장 내내 즐거울 수 있었다. 빡빡한 전시 일정에도, 폭설에도- 목욕을 즐길 수 있었고, 에잇- 하고 룸 서비스를 시켜 먹고, 노래를 크게 틀고, 나체로 침대에 풍덩 뛰어들었다. 그래,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말했던 것처럼 '텍스트는 명령이다.'
김민철씨의 글은 경쾌하고 산뜻하다. 언젠가 박웅현씨의 강연을 들은 기억이 났다. 달구가 TBWA에 면접을 보러간 일화도 떠올랐다. 그정도의 친근함과 가까움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친구를 새로 사귄 기분이었다.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참 좋았고, 그 덕에 나를 돌아보기 좋았다.
엄마, 나는 내가 검은 건반이어서 좋아.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아버렸다. 생각해본 것도 아니고, 결심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버렸다.' 출근길 광역버스 안에 매달려 있던 더없이 칙칙한 쑥색 커튼 때문이었다. 며칠째 계속 야근을 하고, 귀신처럼 일어나 출근 버스를 탔을 뿐이었다. 버스 안에서라도 모자란 잠을 보충하려고 무심결에 커튼을 치던 찰나, 그 쑥색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아버렸다.
사소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도처에 존재한다. 문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느냐. 그렇게 증거들은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 어느 날 눈에 띄면, 확신과 과감함으로 삶을 뒤흔든다. 나는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회사에서 보내준 근조 화환을 보고 회사를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화환들이 줄 서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 구실을 한다는 것은 장례식장의 화환이구나. 딱 저만큼의 무게감과 존재감이구나- 생각했다. 우습게도, 그 구실을 좀 더 잘해보고 싶었다.
지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곳에서도, 그때, 불만족스러울 것이다....그러니 나의 의무는, 지금, 이곳이다. 내 일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이 일상을 무화(無化)시켜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의무이다.
이직을 했다. 중고 신입으로.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발목을 잡는 순간들이 있다. 더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아야 할 일과 할 수 없음-정확히 말하자면, 하는 것이 고역에 가깝게 하기 싫음-에도 해야할 일들이 생겼다. 만족과 불만족으로 일상을 가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저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내며 발전하고 싶다.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것,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항상 깨어 있는 것,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부단한 성실성으로 순간순간에 임하는 것,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 오직 지금만을 살아가는 것, 오직 이곳만을 살아가는 것, 쉬이 좌절하지 않는 것,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 피할 수 없다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일상에서 도피하지 않는 것, 일상을 살아나가는 것.
현재와 순간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며.
술을 마셨고, 가을이었고, 은행잎이 떨어지고 있었고, 노란 조명과 그 은행잎이 만나서 세상이 다 노랗고, 예뻤고, 선선했고, 기분이 좋았고, 젠장, 이곳이 지중해였다. 내가, 지금, 여기를 이보다 더 오롯이 살 수는 없는데, 지구 반대편에 지중해가 무슨 상관인 건가.'우리 놀라운 순간을 함께했어. 알지?'60살이 된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았다. 고요한 얼굴이고 싶었다. 세상의 어떤 풍파도 감히 박살낼 수 없는 깊고 따뜻한 얼굴이면 좋겠다 싶었다. 늙었다면 그저 늙는 것이 아니라 잘 늙어야 했다. 그때면 얼굴에 모든 것이 다 새겨져 있을 텐데. 그 얼굴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삶의 순간을 꼼꼼히 기록하고 싶다. 어제의 술과 음악이 지나간 계절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그렇게 제 멋에 살다 가고 싶고, 내 곁을 지키는 사람도, 일도 챙기고 싶다. 그런 다짐을 또, 한 번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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