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의 황혼
어느 날 떠나왔던 길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걸 깨달을 때. 모든 게 아득해 보일 때가 있다. 이럴 때 삶은 참혹하게 물이 빠져 버린 댐 가장자리 붉은 지층이다.
도저히 기억되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들이 한눈에 드러나는 그 아득함. 한때는 뿌리였다가, 한때는 뼈였다가, 또 한때는 흙이었다가 이제는 지층이 되어 버린 것들. 그것들이 모두 아득하다.
예쁘장한 계단 어디에선가 사랑을 부풀리기도 했고, 사랑이 떠나면 체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온다고 믿었던 사랑은 없었다. 떠나면 그뿐, 사랑은 늘 황혼처럼 멀었다.
병든 것들은 늘 그랬다. 쉽게 칼날 같았고 쉽게 울었고 쉽게 무너졌다. 이미 병들었는데 또 무엇이 아팠을까. 병든 것들은 죽고 다시 오지 않았다. 병든 것들은 차오르는 물 속에서 죽음 이외에 또 무엇을 알았을까.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마른 날. 떠나온 길들이 아득했던 날 만난 붉은 지층. 왜 나는 떠나 버린 것들이 모두 지층이 된다는 걸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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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 수록되어 있는 시, 지층의 황혼을 옮겨적는다. 언젠가 H가 헤어짐을 '사물이 되어간다'라고 표현한 것이 떠올랐다.
방 구석 어디선가 먼지만 덮어쓰고 있을테지만, 그 먼지를 털어봐야 다시 제 자리에 앉을 거라는 그의 말이 애잔하기도 하고, 담담하기도 하여 한동안 꽤나 곱씹었다.
시인이 쓰는 '아득하다'를 두어번 입 안에서 웅얼거리다 사전을 찾아본다.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 희미하고 매우 멀다. 또는, 까마득히 오래되다. '아드카다' 라고 소리를 내본다. 주문을 외우는 것마냥 잠잠해진다. 마음도 아득해진다.
오늘같이 빗방울이 살짝 들이치는 밤이면, 한때의, 또는 찰나의 감정과 표정과 음율들이 떠오른다. 비단 옛 감정만이 아니다. 요즘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감정이 있다. 관절 마디처럼 자연스럽게 구부러져야하는데, 손등으로 스윽 살갗을 스칠 때면 좀처럼 곤란해져버린다. 이마저도 언젠가 지층으로 남겠지.
병들지 않으려면, 떠나보내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
어느 날 떠나왔던 길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걸 깨달을 때. 모든 게 아득해 보일 때가 있다. 이럴 때 삶은 참혹하게 물이 빠져 버린 댐 가장자리 붉은 지층이다.
도저히 기억되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들이 한눈에 드러나는 그 아득함. 한때는 뿌리였다가, 한때는 뼈였다가, 또 한때는 흙이었다가 이제는 지층이 되어 버린 것들. 그것들이 모두 아득하다.
예쁘장한 계단 어디에선가 사랑을 부풀리기도 했고, 사랑이 떠나면 체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온다고 믿었던 사랑은 없었다. 떠나면 그뿐, 사랑은 늘 황혼처럼 멀었다.
병든 것들은 늘 그랬다. 쉽게 칼날 같았고 쉽게 울었고 쉽게 무너졌다. 이미 병들었는데 또 무엇이 아팠을까. 병든 것들은 죽고 다시 오지 않았다. 병든 것들은 차오르는 물 속에서 죽음 이외에 또 무엇을 알았을까.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마른 날. 떠나온 길들이 아득했던 날 만난 붉은 지층. 왜 나는 떠나 버린 것들이 모두 지층이 된다는 걸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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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 수록되어 있는 시, 지층의 황혼을 옮겨적는다. 언젠가 H가 헤어짐을 '사물이 되어간다'라고 표현한 것이 떠올랐다.
방 구석 어디선가 먼지만 덮어쓰고 있을테지만, 그 먼지를 털어봐야 다시 제 자리에 앉을 거라는 그의 말이 애잔하기도 하고, 담담하기도 하여 한동안 꽤나 곱씹었다.
시인이 쓰는 '아득하다'를 두어번 입 안에서 웅얼거리다 사전을 찾아본다.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 희미하고 매우 멀다. 또는, 까마득히 오래되다. '아드카다' 라고 소리를 내본다. 주문을 외우는 것마냥 잠잠해진다. 마음도 아득해진다.
오늘같이 빗방울이 살짝 들이치는 밤이면, 한때의, 또는 찰나의 감정과 표정과 음율들이 떠오른다. 비단 옛 감정만이 아니다. 요즘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감정이 있다. 관절 마디처럼 자연스럽게 구부러져야하는데, 손등으로 스윽 살갗을 스칠 때면 좀처럼 곤란해져버린다. 이마저도 언젠가 지층으로 남겠지.
병들지 않으려면, 떠나보내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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